들어가는 말
크리스천 리더십은 그 자체가 독특한 분야이다. 전통적인 신학과목과 비교해 볼 때, 리더십은 적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연구자의 목회 현장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크리스천 리더십과 관련된 강의 내용이나 연구 방법이 다른 과목과 구분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 분야 중에 하나가 선교사나 목회자 자신과 자신의 독특한 은사, 그리고 사역 현장(context)을 이해하는 것이다. 크리스천 리더십이 독특한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목회학을 책임 있고 효과 있게 감당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분명히 규명해야 할 요소들이 있다. 크리스천 리더십이 기존의 신학의 바탕에 근거한 것이고, 선교신학에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의 전통적인 신학(Academic Theology)과의 차이점, 실천신학과의 차이점, 그리고 선교신학과의 차이점 등이다. 신학이 목회를 섬기는 역할 보다는 목회를 비판하는 역할에 편중되는 한국교회의 신학 풍토를 고려할 때, 이미 언급한 요소들을 이해함이 없이는 크리스천 리더십의 이해나 연구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여기서는 신학의 체계에 있어서, 리더십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그 방법의 특징을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서, 현장 사역의 관점에서 신학이란 무엇인가, 실천신학과 선교신학은 무엇인가, 선교학은 무엇인가, 그리고 선교학의 한 분야로서 리더십의 위치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신학이란 무엇인가를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일반 학문의 체계에서 신학의 위치와 역할을 먼저 다룬다.
학문의 체계에 있어서 신학의 위치
오늘날은 학문의 분야가 방대해졌다. 여기서는 그 다양한 분야들을 학문의 대상, 방법 그리고 범위 등의 특성을 따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구분을 하고 그 중에 한 분야인 신학을 다시 네 가지 분야로 구분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서 신학의 주요 관심 사항과 그 역할을 이해하고자 한다. 먼저 학문의 전체적인 구조를 언급하고 신학의 분야를 다루고자 한다.
상식 (Common Sense)
1.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이 생각한다고 믿는 느낌, 의식, 관념, 여론 판단력
2. 어떤 사물들이나 사건을 평가하거나 관리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것으로서 정당하고 신중한 생각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는 것. 여기서의 기준은 이론적 근거나 감정적 근거로부터 자유롭고, 전문적인 지식에 근거하지 않는다.
3. 자연적으로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쉽게 동의하는 것
과학 (Science)
1. 연구 또는 실험을 통해서 얻은 지식
2. 자연의 법칙 또는 일반적 원리에 대해서 축적된 지식
3. 물리적 세계(사실)와 현상에 대한 지식
4. 객관적 대상의 인식이 과학의 중요한 관심사이다.
철학 (Philosophy)
1. 어떤 원리나 원인 안에 담겨져 있는 내용을 연구하는 것
2. 사실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보다는 논리적 과정을 통해서 진리를 추구하는 것
3. 근본적 신념의 근거 또는 기초를 비평적으로 시험하는 것
4. 근본적 신념들을 표현하는데 사용되는 기본적 개념들을 분석하는 것
5. 체계적이거나 그렇지 못한 지식, 삶의 내용들, 세상의 일반적 속성 그리고 신념의 정당성에 대한 합리적 비평적 사고
신학 (Theology)
1. 종교 차원의 믿음, 신앙 생활 그리고 경험 등에 대한 이론적 설명
2. 종교 또는 종교 그룹의 전통적 교리들의 진술, 적용 그리고 분석
3.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
4. 종교적 신앙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것을 목적으로 삼는 지적 학문
신학의 내용들과 방법들
신학도 학문으로서 그 안에 각기 다른 분야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분야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각기 다른 특징의 방법들을 사용하게 된다.여기서는 신학을 그 내용과 방법에 따라서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이러한 구분은 다른 학문들의 분야에도 적용될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에도 적용되는 요긴한 것이다.
성경신학 (Biblical theology)
선경신학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들을 문맥에 맞추어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다.이 때에 본문의 정치, 경제, 지리, 문화, 종교적 배경은 물론이고 문법적 요소도 중요하게 참고하는 것이다. 성경신학은 주로 성경말씀, 그 자체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진리를 밝혀 내는데 목표를 삼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 현재나 현실의 요소에 구애 받지 않고 본문의 맥락에만 관심을 집중시킨다. 이처럼 성경신학은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를 밝혀냄과 동시에 다른 학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자료들을 제시하게 된다. 성경 성경신학에서 사용되는 방법의 특징은 분석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조직신학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내용들을 주제별로 나눈 다음, 그 주제를 일관성 있게 정리하는 분야이다.어떤 주제를 선정한 다음, 성경 여러 곳으로부터 그 주제에 관련된 자료를 모아서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료들을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에 있는 자료들을 모아서 그리스도론, 기독론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기독교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게 도울 뿐 아니라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을 이해하게 한다. 특히 잘못된 이단 사상이나 다른 종교로부터 기독교를 수호하는 일을 하며 변증하는 자료를 만든다. 조직신학에서 사용되는 방법의 특징은 조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신학(Historical theology)
역사신학은 기독교의 신앙 활동이 역사 선상 (시간과 공간 속에서)에서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각 시대마다의 신앙생활의 원인과 결과를 밝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각 시대마다 성도들이 어떻게 이해하였으며, 또 그 이해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었으며, 그 결과는 다음 시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밝혀내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과 평가를 근거로 삼아서 오늘날의 신앙 흐름을 평가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역사신학에서 사용되는 방법의 특징은 분석 조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천신학(Practical theology)
실천신학은 역사신학이 밝혀 낸 문제들을 해결하고, 역사 신학이 제시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결과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 지역교회가 처해 있는 상황을 바로 이해하고 나아갈 방향을 찾기 위해서는 교회사라는 거울 또는 임상의 결과를 토대로 자신을 평가하고 이에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가를 밝혀낸 다음 성경신학의 도움으로 성경을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는가에 대하여 해답을 얻게 된다. 그리고 난 다음 조직 신학적 검증을 한 후에야 비로소 그 대책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이런 안목에서 볼 때 실천신학은 성경신학, 조직신학 그리고 역사신학을 바탕으로 삼지 않고는 책임 있게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이런 점에서 실천신학에서 사용되는 방법의 특징은 앞의 세 가지 분야의 방법론을 모두 포함하는 종합적 그리고 임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의 위기
간하배(Harive M. Conn)교수에 의하면, 오늘날 신학이 위기적 상황을 직면하고 있다. 계몽주의 이후부터 신학(academic theology)이 신앙의 실천과 점차적으로 멀어졌고 현재는 신학 그 자체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를 풀기에 급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신학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하고 설명하기보다는 하나님에 관해서 설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의 여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신학의 내용이 은유(metaphor)적이 되어졌고 실재(reality)를 들어내는 거울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30여년 동안 이런 위기가 상당히 심각한 정도(epic proportions)로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학문(as an academic discipline)으로서의 신학이 신앙생활, 즉 삶, 예배, 믿음의 공동체들을 섬기는 봉사 사이에 연관성이 거의 없다고 말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신학의 세계는 그 자체의 일관성 있는 방법론과 타당성에 몰두해 있는 반면에 신앙 공동체(faith communities)는 그 공동체가 보수든 진보든 중립이든 상관 없이 학문성을 가진 신학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전통적인 서구 신학 전제들은 신학과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와 실제 신앙생활과 신앙지식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발견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그 결과 교회는 그 사역을 위한 타당한 신학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성경에 지지를 받는 신학을 세우기를 힘쓰는 사람들은 현실에 적합한 신학을 세울 수가 없는 반면에 또 한편으로는 신학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대한 방법론에 치우쳐 있는 사람들은 성경에 지지를 받는 타당한 신학을 세울 수 없게 되는 양극화 현상이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간하배(Harvie M. Conn)에 의하면, 그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지적한다. 첫째로 신학을 철학의 세속적 개념에 의존하는 형이상학적 사변과학으로 보는데 기인한다. 그에 의하면, 신학의 과제를 보편적인 존재론적 과제로 봄으로서 신학은 추상적인 정의들을 규정하고 하나님을 대문자 Being으로 천명하는 것을 그 임무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신학 입장은 사물들이 다른 사물들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둘째로는 신학에 대한 스콜라적인 접근방법에 치중한 결과다. 신학의 관심사는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바 진리 그 자체이다.반면에 청중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진리를 가볍게 본다. 스콜라적인 신학자들이 추구한 것은 진리이지 죄인들이 아니었다. 이들의 의도는 심령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비합리적인 철학과 싸우려는 것이었다 (간하배 :252-253).
잔 후레임(John M. Frame)은 신학과 삶이 양극화 현상의 주요 원인이 신학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신학에 대한 오해들이라 함은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에 따른 이해를 말한다. 주관주의는 신학을 언어를 통하여 기독교적 종교적 감정들(느낌, 직관 그리고 감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성경을 인간의 감정으로 대체하여 그것을 신학의 최종 권위로 인정하고, 이 감정이야말로 인간 상황의 결정적 해석이요, 영적 성장의 긍극적 능력으로 여기는 것이다.이런 이해에서의 신학은 성경의 진리를 인간의 필요성(human need)과 연결시키려 한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반면에 인간적 요구에 부합하도록 성경을 재해석하게 함으로서 인간의 필요가 어느 정도 성경의 구조와 내용을 결정하게 되고, 따라서 인간의 권위가 성경을 대신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평가이다.
객관주의에 있어서 신학은 성경적 진리를 다양한 모습으로 수용하는 데에 필요한 작업이라고 본다. 즉 성경은 “사실들”을 내포하고 있고, 신학자들은 마치 과학자들이 자연의 사실들을 수집하는 것처럼 그러한 사실들을 수집하고 그것들에 관하여 “법칙들(laws)"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신학은 “사실들(facts) 그 자체들로서 내포된 원리들이나 일반적 진리들과 함께 성경의 사실들을 그 적절한 순서와 관계들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요,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전체를 조화시켜 나가는 것”이다(프레임 1992:162). 객관주의적 신학의 정의는 주관주의의 신학작업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 즉, 인간의 권위가 성경을 대신하는 것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공헌을 했지만, 반면에 여러 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를테면, 객관주의적 신학은 성경을 “사실들의 덩어리(body of facts)”로보았고 마치 성경 그 자체가 설명하고 있는 순서에 부적당한 무엇이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결과를 가져 왔으며 인간의 필요성(human need)을 조직적으로 제외시킴으로 성경의 권위와 충족성울 잃어버리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과학자가 진리를 인간의 필요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것이라고 정의하듯이 신학을 순전히 “객관적인”학문이라고 이해 함으로서 신학이 이론과 신학 작업 그 자체에만 제한되도록 영향을 미쳤다.
한국 교회의 신학은 어떠한가? 한국 교회에 있어서의 신학과 삶의 관계 또는 신학과 사역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수영은 한국 개신교회 역시 두 신학의 경향이 신학과 삶 또는 실천이 양극화되는 현상을 가져왔다고 평가한다. 이수영은 한국 개신교회의 신학에 영향을 끼친 정신적 흐름을 크게 세 갈래로 구분하였다.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외에 또 다른 하나는 무신학적인 흐름이다.즉, 성실한 성경연구와 그에 따른 경건한 삶의 추구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서 무지를 향하는 도피적 신비주의와 기복주의적 관심으로 지배되는 신앙 형태이다 (:41-42). 그 두 신학경향 중의 하나는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에 맞서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의 근본 사상을 고수하는 칼빈적, 복음적, 성경적 개혁주의 보수 신학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다양한 사상의 수용과 문화의 접목을 표방하는 일군의 급진적 신학 경향들로 본 것이다. 전자는 그 근저에 인간의 죄와 타락성에 깊은 인식을 깔고 그 위에 하나님의 절대주권,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은총, 성령의 역사의 절대능력, 성경의 절대권위를 중시, 강조하는 신학으로서 신본주의, 계시와 은총의 신학이다. 이수영에 의하면, 이런 신학은 첫째로 그 신학의 구조, 방법, 체질이 사변적이고 연역적이며 교조적인가 하면, 둘째로 그 관심이 신앙생활의 수직적인 면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교인들과 나아가서 일반 세상의 구체적 현실문제에 둔감해지기 쉬우며, 셋째로 교회의 사회적 책임성의 실천에 소극적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한국 개혁주의 보수신학은 본래 종교 개혁자들이 지녔던 복음이해와 생동력과 뜨거움에서 멀어지면서 중세의 스콜라주의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후자 곧, 인본주의 자연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학 경향들은 그 문제의 접근 방법에 있어서 대체로 경험적이고 귀납적이며, 신앙생활의 수직적인 면보다는 인간사회의 현실적인 문제나 문화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행동적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입장이 뚜렷하다.이러한 신학의 결과는 신앙생활의 수직적인 면이 망각되거나 하나님이 서실 자리가 상실되고 복음 자체가 변질되며, 예배, 기도 등 경건 생활에 냉소적이거나 무관심하게 만든 것이다.
다음의 한국 신학자들이 한국 교회의 신학교육과 관련해서 제언하는 내용들은 이수영의 주장을 지지한다.
전호진 교수-오늘의 커리큘럼도 성경에 기초하면서 우리 문화와 시대 상황에 상관성(relevance)을 추구해야 한다. 신학교육은 교회를 위한 신학교육을 해야 한다.
신성종 교수-나는 신학교의 커리큘럼을 실제적인 면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목회해 보지 않고는 아예 신학교수는 하지 말라고 나는 강조한다. 신학이론을 살아있는 신학으로 새롭게 세워 가는 것이 필요하다.
조종남 교수-신학교육을 구체적인 삶의 현실과 직결시키는 문제가 시급하다. 교역과 직결되는 신학, 삶의 문제와 직결되는 교과목 편성이 시급하다 (김명혁 1998:275).
이 상의 제언들이 한국 교회의 신학적 현실을 타당하게 지적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한국 교회의 보수주의 신학이 목회 현장과 유리된 지식 편중 경향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동시에 한국 보수 개혁주의 신학 역시 간하배나 후레임이 경고하는 바, 서구신학이 직면한 위기를 함께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신학을 객관적인 학문이라고 이해 함으로서 이론과 신학작업 그 자체에만 관심을 갖고있을 뿐 아니라 목회 현장과는 상관성이 없는 사변적인 지식에 몰두해 있고, 신학 작업을 통해서 세상의 구체적 현실문제를 풀어나가는데 둔감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 결과로서 실천신학에 해당되는 신학 작업은 단순하고 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조직신학이나 성경신학은 어렵고 중요한 것이어서 학적으로 신뢰할 만하다는 잘못된 이해를 갖게 했다.. 바른 실천신학이 상실되고 있는 보다 근본적인 또 다른 이유는 말씀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동안에 계몽주의의의 영향(skepticism)이 실천신학으로 하여금 그 토대를 잃어버리도록 한 것이다.교회 안에 신학적 다원주의를 수용 함으로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삶의 실천(guidelines)대신에 사고 영역(trajectories)이나 그 영역의 변화(paradigms)에 관심을 갖게 했다.실용주의는 삶이나 신앙생활에 대한 신학적인 반성을 축소시켰다 (Conn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신학교육의 영향을 받은 목회자들은 양극화 현상 가운데 있으면서 심각한 혼란과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것이다. 더러는 조직신학이나 성경신학의 학문적 가치를 숭상하여 지역교회에서 이에 해당하는 신학지식을 가르침으로 교회를 학문의 전당 또는 신학교로 만들려고 애쓰는 것이 바른 목회라고 생각한다. 이런 입장에 있는 목회자들은 제자훈련, 전도훈련, 평신도 양육, 은사를 중심 한 사역 등의 프로그램이나 세미나를 천박하게 여기고 비판하게 된다.반면에 더러는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외면하고 목회 현장에서 터득한 경험을 중심으로 목회 사역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히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의 목회 철학을 갖게 되고 신학적 전통이나 책임감 없이 개교회의 실용주의적 이기주의에 사로잡혀있는 것이다. 이런 면을 고려할 때, 신학과 목회 일선의 실천목회와 상호 협력에 대한 토대가 시급히 세워져야 한다는 위기적 상황에 한국 개혁주의 교회가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실의 삶이나 사역에 실제적으로 연관되는 신학을 정립할 수 있는가? 사실, 이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다양한 노력이 성경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 선교신학 내에서 기울여지고 있다. 신학의 목회적 또는 선교적 차원을 회복시킬 수 있는 신학을 세워야 한다는데 인식 아래, 삶 또는 사역과 직결되는 신학을 세우는 신학 방법론 형성을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사역의 관점에서 신학의 체계를 이해하고 그 상호 연관성을 이해해 봄으로서, 목회 현장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신학작업의 필요성과 중요성 그리고 그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갖고자 한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서, 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는 것이 요구된다. 따라서 신학의 정의와 임무를 살펴본 다음 신학의 구조와 그 상관관계를 이해 함으로서 목표에 도달하고자 한다.
신학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신학(Christian Theology) 안에는 신학을 수행하는 신학적 방향, 즉 사고의 방향성과 지식론의 기초에 따라 다양한 신학이 있다.따라서 기독교 신학을 이해하거나 수행함에 있어서 신학적 사고의 방향성과 지식론의 기초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신학은 이러한 방향성과 지식을 토대로 한 스스로의 세계관을 가지게 되며, 이 세계관의 관점을 통해서 스스로를 관찰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원리를 강조 한다.이런 점에서 신학은 자신의 세계관을 떠나서 다른 관점에서 자신을 평가하는 것에 대해 관대하지 못하다.그러므로 신학을 이해할 때, 일차적으로 그 신학 내부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뿐만 아니라 신학을 수행함, 실천함에 있어서도 자신이 수행하고자 하는 신학의 방향성과 지식론의 기초를 이해하는 것 뿐 아니라 이를 실천하는 신학적 훈련이 필요하다 (후레임 1993:5).여기서는 가능한 한 신학이란 용어를 다양한 측면을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하고자 한다 (후레임 1993:161).
후레임은 정당하게 강조하는 바와 같이, 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는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비롯된다. 성경을 단순한 사실들의 기록이 아닌 언어요 자체의 합리적인 순서를 가지고 있으며, 구속의 사실들에 관해 완벽하고 규범적이며, 합리적인 기술과 분석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신학은 부차적인 묘사, 즉 명제적 내용과 비명제적 내용 모두를 갖고 있는 성경에 대한 재해석 및 재 천명이 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재해석 작업은 인간의 필요를 얻기 위해서다.신학의 일은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이해하건 하지 않건 상관치 않는 추상적이고도 완벽한 진리의 종류를 제공하는데 있지 않고, 인간으로 하여금 성경을 보다 잘 이해하도록 돕는데 있다. 신학이 정당화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진리에 부합된다고 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진리를 사용하도록 돕는데 있다. 그러므로 신학의 가장 적절한 개념은 성경이(normative perspective) 인간들에 의해서(existential perspective) 상황에(situational perspective)에 적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경 대신에 다른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상황에 성경을 적용하려는 작업이다 (후레임 1993:166). 만일 신학이 인간의 필요(human need)을 조직적으로 제외시키려 한다면, 이는 성경의 권위와 충족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후레임 1993:167).
이런 점에서 신학은 “순수한 객관적 진리(purely objective truth)"가 아니다. 인간들이 행하는 신학들은 모든 시간과 장소를 위한 인간을 위한 진리로서의 최상의 모습이 될 수 없다. 모든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최상의 진리는 오직 성경 만이다. 신학들이란 보편적이고도 특정한 시간과 공간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 성경을 보다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할 뿐이다 (후레임1993:168). 이런 이해에 근거해서 후레임은 신학을 “인간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전 영역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후레임 1993:161). 그의 정의는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다른 정의 즉,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에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으로서 성경의 지지를 받는다. 이에 대한 근거로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성경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기 전에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마16:3; 22:29; 눅 24:25; 요 5:39f; 롬15:4 딤후 3: 16f; 벧후 1:19-21).성경의 전체 목적은 우리의 삶 속에 진리를 적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요20:31; 롬15:4; 딤후 3:16f).더 나아가 성경의 적용은 성경의 특수한 진술과 마찬가지로 권위가 있다. . .적용이라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교훈으로서 권위적이지 않다면, 성경의 권위는 단지 죽은 문자(a dead letter)에 지나지 않게 된다.인간은 성경의 말씀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읗 수 없다.또한 성경의 분명한 진술을 번역하고 주석하는데 있어서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 .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두려움이 아닌 자신감을 가지고 말씀을 번역하고 주석하고 적용해야만 할 것이다 (후레임 1993:175).어떤 사람이 본문을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할 때, 그 “의미”에 대해 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허하고 무의미한 주장이 된다.따라서 의미를 안다는 것은 곧 그 적용에 달려 있는 것이다 (후레임 1993:143).
후레임과 같은 맥락에서, 간하배는 칼빈의 신학방법론을 가리켜 복음의 상황 참여화라고 일컫는다 (:253).간하배가 칼빈의 신학방법론을 복음의 상황참여화로 일컫는 보다 근본적인 근거는 그가 신학을 진리와 상황의 조우로 이해하는데 있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의 수령자 중심적(receptor-oriented) 성격을 띄고 있다고 주장한다.하나님께서 베푸신 언약이 오고 오는 모든 시대에 사람들에게 신실하게 지켜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 계시는 각 시대 사람들의 상황에서 새롭게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그의 이런 이해는 선교신학의 신학화(theologizing)에 기여했으며 벤 엔겐(Van Engen)은 이를 그의 책, Mission on the Way에서 선교신학의 방법론에 적용, 발전시켰다.벤 엔겐의 책은 선교신학의 최근 동향은 물론, 신학화를 위한 원리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접근해야 하는 것과 같다.그의 사역은 복음주의적 차원이었으며 그는 복음을 그 자신이 속한 시간과 장소(공간)에 적용시키려고 했다.그는 성경을 통해서 다른 시간과 장소로 거슬러 올라가서 얻은 통찰들을 통해 현재를 변화시키려고 했다 (간하배 1992:251).
이와 같이 각 시대의 교회들이 처해있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와 문제 인식,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감이 그들의 신학 작업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이처럼 신학의 임무는 인간이 처한 상황에서 동떨어진 추상성 속에서의 진리 그 자체를 찾는 것이 아니오, 문제에 직면해 있는 성도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얻어서 가르치고 전파하고 상담해 주며 복음을 전해 줌으로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겸손히 봉사하는데 있는 것이다 (후레임 1993:174).따라서 신학이 추구하는바, 하나님 말씀(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는 신앙의 공통체가 처해있는 실존적 상황(context)이나 신학 작업을 추구하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신학을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때, 모든 신학 작업들은 적용을 목표로 삼아야 하며 적용을 위해서 서로 연관성을 가지며 협력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 된다.. 신학을 일종의 적용이라고 할 때, 신학은 어떤 종류의 질문들에 해답을 주고, 어떤 종류의 인간의 필요들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신학을 당연히 이론적이요 아카데믹한 그 무엇으로 삼는다든지, 신학의 임무를 이론적인 영역에 한정시키거나 기독교적인 가르침을 보다 이론화할수록 더욱더 “신학적(theological)" 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적절한 이해라고 할 수 없다.신학이란 딱딱한 형식과 아카데믹한 모습으로 쓰여져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오해에서 비롯 된 것이다.오히려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성경 자체가 그러하듯이 더 폭 넓은 인간의 언어들을 사용해야만 한다.
이런 관점에서 기존의 전통적인 신학적 작업들을 이해하는 것과 그 작업들이 전체적인 신학의 체계에 있어서 어떤 역할과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때, 비로소 신학, 그 자체와 각각의 신학 작업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갖게 된다.만일 여러 신학적 “관점”에 대하여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이는 어느 하나의 관점을 내세운 채 다른 관점을 가진사람들을 무시하는 경건치 못한 교만을 이루게 될 수도 있고 또한 교회 내의 불화를 일으킬 수도 있게 된다 (후레임 1992:120).
끝내는 말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첫째로 전통적인 신학의 분야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깨닫고 그 지식을 삶에(사역을 통해서) 적용하는 과정(process)에 한 단계를 구성하는 요소라는 점을 알게 된다.둘째로 전통적인 신학의 분야들, 이를테면 주석신학, 성경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뿐 아니라 프로그램들, 방법들, 전략들도 제각기 신학의 한 분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이들은 다른 주체를 가짐으로써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공통의 관점인 적용을 향하여 서로 관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다시 말해서, 이 모든 것들은 각기 다른 주제를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 동일한 것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그것들은 집중이나 강조에 있어서 서로 다르며, 그 자료들을다르게 조직하는데 있어서 다르며, 각각의 분야는 서로 다른 특징적인 방법을 취하는데 있어서만 다를 뿐이다(후레임 1992:109).